[묵상]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사순 제1주간 목요일 (2020.3.5.)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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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렇게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청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청하고 유익한 것을 청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청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잘 알려진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은 당시 유명한 라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의 자세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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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주려는 마음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복음: 마태오 7,7-1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 보니 여행을 못 했는데 세계 일주를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당황하며 “그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젊고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청할 수도 있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고 청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함께 여행 갈 것을 청했는데 남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청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청하는 것이 저주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고 임언기 신부가 간암 말기로 임종이 임박한 오랜 냉담 신자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갔을 때, 그 환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 죄 없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냥 죄 없는 것 같아도 용서만 청하면 사제가 알아서 다 해 주는데도 끝까지 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평소에 남에게 무언가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여겨야 무언가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복음 바로 위에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이미 남에게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받을 자세가 안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로 끝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며 미운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성체와 같은 거룩한 것을 주어도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주지 않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마귀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 청하면 바로 용서받고 구원받는데도 아무것도 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까지 양심이 그 가책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양심은 “너도 안 주면서, 뭘 청하냐?”라고 말합니다. 청하면 다 받을 수 있는데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양심상 청하지 못하고 그러다 지옥까지 가면서도 구원을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황금률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시며 남에게 해 주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기 위해서는 나도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 이웃에게 나의 것을 주려는 마음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지옥문 앞에서 구원을 청할 수조차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