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2020.2.29.)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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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잔치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과 어울리시려고 식탁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세리인 레위가 ‘회개’하였다는 사실에 기뻐하시며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라는 문장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의 세리는 헤로데 영주의 공무원으로서 매우 높은 임금을 받았고,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는 폭리를 취할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그만두면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던 레위가 자기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렇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리라는 직업에 따라오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의미 있는 삶 가운데에서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실존적인 병마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건강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부유함입니까, 아니면 의미입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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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기쁘면 회개한 것이다>
복음: 루카 5,27ㄴ-3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 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온통 비극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테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있었습니다.
참다못한 케테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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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주신 말씀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27ㄴ-32)
겉으로는 번지르했는데 속은 허할 수 밖에 없는 인물,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세리야 당시에 나름 세속적으로 성공한 부류에 속해있지만 갈릴래아에서는 그 입장이 좀 달랐습니다. 변방 갈릴래아에서는 로마 당국의 강력한 통제가 좀 느슨했던 터라 세리의 재량권이 더 강했습니다. 한마디로 등쳐먹기 딱 좋은 구조였던 것이죠. 후에 마태오라는 이름을 얻게 된 레위,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정통 유다인이었음에도 로마라는 당대 권력에 빌붙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이 엇나가 급기야 세상에서 증오받던 부역자 세리가 되어 있습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의 눈에 그가 어떻게 보였던 것일까요. 뜬금없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이고 인생을 바꾸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인생을 바꾼 한 마디, 레위는 세관이라는 자기 삶의 근거를 떠납니다. 뭐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한 마디 아닌가요.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그가 과거와 단절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은 이는 비단 그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실은 세리로 살면서도 레위는 자기 삶에 불만, 공허함, 죄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죠. 벗어나고 싶은데 어찌할 바 모르는 그런 상태, 나름 괜찮은데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그런 불안정함.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돈에 취하고 세상에 사로잡혀 살긴 사는데 지금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막막함과 초조함. 그것이 우리 삶을 부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그때 느닷없이 들려온 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그 한 마디에 그가 따라 나선 것입니다.
고민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만 고민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힘들어야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냥 거기에 머물지 않으려는 이는 고민합니다. 당연히 불안할 수 밖에 없죠. 그냥 살려고 하면 고민 따위는 던져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고민하던 끝에 누군가가 던진 그 한마디, 어디서 읽은 한 문장, 번득 떠오른 단상 하나가 새로운 경지로 나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채워지지 않은 삶의 문제로 번민할 때 ‘나를 따라오너라’ 그 한 마디가 변화의 시작이 되었듯 말입니다.
그러니 불만은 부르심의 조건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여전히 공허하다면 이제는 바꿀 때가 된 것이죠. 이대로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속에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샘솟아 나고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강력한 이끄심을 찾게 될 것입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