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 1,57-66) -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024.12.23.)
[묵상]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 1,57-66) -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024.12.23.)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이것’ 아닌 은총의 다른 통로는 없다 >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주님께 9일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미사 시간에 양쪽 다리에 고행용 쇠사슬을 착용하고 기도와 함께 고행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고해성사 때가 되어 영적 지도자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습니다. 영적 지도자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고행을 말하려고 했고 영적 지도자도 그것을 당연히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 신부님은 허락도 없이 그런 고행을 하는 것에 매우 놀라고 건강 때문이라도 그런 고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행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으셨는지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에게는 하느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은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자기 생각을 바꾸고 고해신부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고해신부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고 묵상하기 위해 성당에 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은총을 주라고 청한 그 영혼에 그 은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나의 대리자에게 완전히 순명했기 때문에, 네가 전구하고 자비를 청한 그 영혼에 은총을 주었다. 네가 너 자신의 의지를 접을 때에 나의 은총이 네 안에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예수님은 파우스티나에게 노트 한쪽 페이지에 엑스 표를 하고 그 위에 “오늘부터 나 자신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쓰게 하시고, 그 뒷면에는 “오늘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 나는 하느님의 의지를 행한다.”라고 쓰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더 많이 포기하는 이에게 더 주십니다. 자녀가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나간다면 부모가 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모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면 부모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은총은 순종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제는 즈카르야도 파우스티나 성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뜻을 접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인데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논문을 쓰면서 이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학생의 생각이 교수님의 생각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논문은 교수님이 통과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 교수님이 바꾸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공부를 하여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저로서는 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사 논문 첫째 장을 제출하고는 교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걱정하여 음식을 먹고 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꾸라면 다 바꾸어주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은총이 찾아왔습니다.
신학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수 신부님이 가르치는 것은 거의 이단 교리에 가까웠습니다. 동기와 저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통 교리를 써야 할 것인지, 교수가 가르친 것을 써야 하는지. 그 친구는 자신의 소신대로 썼고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저는 교수가 가르친 것을 잘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겐 후한 점수를 주셨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용기가 대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수를 받으려고 하면서 그 점수를 주는 대상을 무시해서는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르투르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자신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셔서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내 뜻을 많이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그 은총을 받기 위해 그분의 뜻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과 그분이 파견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https://youtu.be/A3BoW8RY3Mw?si=suwH5e4f0HrISxOe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For surely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him. Lk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