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1-45) - 사순 제5주일 (2023.3.26.)

honephil 2023. 3. 26. 06:53

[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1-45) - 사순 제5주일 (2023.3.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5
그때에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삶의 활력은 어디 위에 내리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를 얻는데, 이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반면 성령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죽음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를 무기력증이라고 합니다. 무기력증은 번아웃과는 다르게 삶의 에너지는 있지만,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잃었을 때 옵니다.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을 받고 부와 명예와 가족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가 어쩌면 가장 부러워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다”라고 하며 엽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왜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고도 삶의 의욕을 잃었을까요? 마를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평생 쓸 돈을 다 벌었고 많은 남성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삶의 활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싶었고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36세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 같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바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인정이 바로 성령과 같습니다.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받는 인정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리 밑 어딘가에 있다는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다른 무엇도 하기 싫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의 친 부모이고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헤쳐 나갈 힘이 생겼습니다. 

 

    삶의 활력은 이렇게 나의 창조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그분들을 믿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성령을 불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자기 죽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그리고 이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제단에 황소를 바쳤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나를 봉헌할 때 하늘에서 나를 성령으로 사르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자 삶의 활력입니다. 

 

    엘리야도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자신이 봉헌하는 제물을 사르게 하였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서 ‘성령의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활력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창조자로부터 받는 인정입니다. 피조물의 유일한 삶의 활력은 창조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성령을 강력히 체험했을 때는 모두 ‘믿음의 순종’에 관련된 일이 있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나는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너무 외로웠습니다. 죄를 짓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가슴으로 느껴진 때가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길을 달리는데 귀밑으로 스치는 바람이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부터 외로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 분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또 사제 서품식을 앞두고 피정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사제로 불러줬다는 확신만 주신다면 사제 생활을 힘차게 해 나가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러나 피정 마지막 날까지 어떤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날 실망하여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잎새를 단 한 나무에서 그 잎새가 그 순간에 떨어지며 주님께서 저를 창조 이전부터 사제로 불러주셨음이 믿어졌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주님의 뜻 위에 믿음으로 순종 하려고 자신을 봉헌하는 제물 위에 삶의 의미를 내리셔서 그 사람을 불타게 하여 활기차게 살게 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0P4f56U9J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요한 11,9

If one walks during the day, he does not stumble, because he sees the light of this world. Jn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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