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10,2-16) -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2021.10.3.)
한국 교회는 1968년부터 군 사목에 종사하고 있는 군종 사제를 비롯하여 군인 성당,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돕고자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오늘 전국 각 본당에서는 군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 헌금을 봉헌한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만나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한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느님 앞에서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앞에서 한 말과 지금 이 말이 같은 사람이 한 것으로 보이나요? 아담의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아담은 남편이 아니라, 이른바 ‘남의 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인류의 첫 부부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부부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맞이한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견뎌 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때로는 ‘남의 편’ 같고, 때로는 ‘부인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남편 그리고 아내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어 한 몸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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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 들어갈 길이 없다>
오늘 복음은 혼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 번 성사된 혼인은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혼인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믿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은 행복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코스가 자아의 종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도 자기완성을 이루면 안 될까요? 혼자 살아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나를 죽여 피를 내어주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서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면 그 둘은 혼인 관계가 됩니다. 혼인이 아닌 이상 이것을 배울 곳은 없습니다. 사제도 혼인합니다. 신자들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내어주는 법을 배웁니다.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혼인한 사람뿐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을 위해서도 내 피를 완전히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둘의 열매인 자녀가 있음에도 그 능력을 배울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행히 혼인 안에는 자아의 소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혼인이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결혼한 아내요, 한 아이의 엄마인 자매가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가 된 후, 자아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공감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니까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하시면 신앙인이고, ‘그러니까 결혼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집안일이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밉게만 보이던 우리 엄마가 점점 이해가 된다.
점점 엄마에게 동질감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꾸자꾸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엄마는 당연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 엄마는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거였구나.
엄마는 나와 아빠를 미워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남이 먹은 거 치우고 남이 먹을 거 차리고
예전 같았으면 불공평하다고 내가 시다냐고 버럭 했을 일들을
포기가 쌓여 이젠 잘도한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변기가 이렇게 자주 더러워지는지
예전엔 몰랐다.
몇 명이서 쌀을 몇 킬로 사야 한 달을 먹는지
반찬은 뭐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저 빨래는 돌아가다가 언제 끝나는지
밥은 몇 시쯤 차려야 하는지
이런 집안일 계산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뺑글뺑글 돈다.
이걸.... 앞으로 몇십 년을 해야 하나
손목 무릎 아작나도 속으로 눈물 먹으며 한다.
나 말곤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하고 나면 밤엔 쉬고 싶다.
잠자리 갖는 것도 귀찮다.
애 낳고 이제 전업주부로서 일자리도 잃게 되면
나의 자아는 완벽히 끝이 난다.
나는 이제 남편의 성공을 바라는 서포터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돈의 힘은 크다.
집 명의도 남편 쪽...
내 돈은 고작 혼수와 결혼 준비 따위로 다 날려버리고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면..
감히 집안일 반반 하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남편도 당당히 퍼질러있기 시작한다.
내가 이 집안을 떠나서 홀로 선다면?
내가 지금 경단이 몇 년인가...
나 혼자 집을 구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사고 그럴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갑자기 집이 안락하게 느껴진다.
밖에서 실컷 남편 욕을 하며 풀어지면 다시 집에 와 집안일을 한다.
내 남편 욕만 잘 들어주면 되지 그냥 내 갑갑한 속만 풀어주면 되지
떠날 생각은 없다.
이쯤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이다.
남편 성 매수쯤은 무감각하다.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돈이나 벌어와라...
매일 전쟁 같은 아침...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너도나도 자기 일자리로 출발하면
나는 홀로 텅 빈 집에 남아
슥 삭 슥 삭 뒷정리를 하고 집안일을 한다.
햇빛이 좋아 잠시 창밖 풍경을 본다.
남편이 밤에 먹고 그대로 두고 간 상하기 시작한 컵라면.
단 한 번도 먼저 닦여있지 않은 세면대.
식사 후 남편은 누워서 폰 게임하러 갈 때...
그걸 내가 치우고 설거지할 때...
남편과 자식이 방과 소파를 차지해
내 자리는 부엌밖에 없을 때
내 자아는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할 새에 점점 좀먹어간다... 흩어진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헉하고 문득 뒤돌아보면 예전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서서히 순응하며 하고 있다.
내 자아는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
내 남편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가서 붙는다.
그들만을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과 목표가 곧 내 성취가 되고 목표가 된다.
결혼 후에 머릿속에선 정말 생경한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초반에 그 자아 상실의 느낌이 갑갑하고 익사하는 것 같아
많이 울고불고 발버둥도 쳐봤으나
쇠창살이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안을
영원히 탓 탓 탓 달리고 있는 거 같아 포기하게 된다.
이젠 멍한 상태로 그 속에서 미소 짓고 있다.
여자가 결혼하면 나는 없어지고 엄마가 된다는 말...
말로는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짜 이해하지 못했다.
진짜 경험해보면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한다는 건 그전 내 이름 세 글자... 내 인생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집안과 식구들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 나갔던
그 자유.
내 목표, 나의 꿈, 사회에서의 내 위치 모조리 분쇄되고
어머니, 아내만 남아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결혼은 자아의 종말이다.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야 비로소 깨지는 지독한 환상이다.
사랑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가 깨지는 것입니다. 로맨스 소설을 보며 결혼을 환상적으로 여길 때, 그때 사랑을 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실상은 사랑은 로맨스가 깨질 때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로맨스는 상대를 이용하여 내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랑은 그 로맨스가 죽을 때 상대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성부라면 아내는 성자와 같고 둘을 이어주는 힘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가 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실현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하셔서 내어주는 당신들의 피와 생명이 ‘성령’입니다. 쌍방의 이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만 있다면 분열이요 그냥 둘입니다.
사랑은 나를 죽여야 해서 항상 셋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것을 만들기 위해 둘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서로를 죽이는 이 혼인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면 하느님 삼위일체를 닮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자녀도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삼위일체 혼인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황금 원석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어서 이대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정제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순금으로 태어납니다.
용광로는 고통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용광로가 혼인입니다. 불순한 원석끼리
만나서 황금이 되겠다는 게 로맨스입니다. 그건 환상일 뿐입니다. 이 환상이 깨져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데 그 환상이 깨지는 장소가 가정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10.9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no human being must seprate.
Mk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