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

[묵상]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르코 9,2-10)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21.8.6.)

honephil 2021. 8. 6. 06:34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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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 행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주님의 변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직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코는 높은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옷은 그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사제는 사제 옷이 있고 법관은 법관 옷이 있으며 경찰관은 그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옷이 변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빛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산 높이 데리고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라 믿고 성체를 영했지만, 그전에는 그저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비로소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깨달았을 때 옵니다.

 

    다시 말해 산에 오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당신 피임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직접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져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을 시키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고 아들은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버지나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한 달을 버텨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로에 집어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어 불을 껐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는 재산의 가치를 모를 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큰 선물을 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주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됩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흘리실 피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게 해 준 것에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섬길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싸워 이겨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이 쉬웠을까요? 하지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방법이 있는데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가치를 묵상하고 나도 이웃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씻기 위해 흘리는 피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본 어떤 선생님은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습니다.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입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그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교사로 불립니다. 밤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마약중독, 매춘, 야쿠자와 관련이 있던 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자 야쿠자 두목이 “손가락 하나를 두고 가라.”라고 협박하였고 오사무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학생을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일본인도 아니고 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오사무씨는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등 숱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13년 동안 밤거리에서 학생과 만났고 50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한 소년의 미래를 위해 내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밤거리에서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선생님 희생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그만큼 덜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만큼 우리 행복은 커집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올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는 방법입니다.

https://youtu.be/IJL6JPhAke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르코 9,2-10)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21.8.6.)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 9.3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lte,

such as no fuller on earth could bleach them.

Mk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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