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 15,21-28)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21.8.4.)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마태 15,1-20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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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지 마!”와 “난 거짓말을 싫어해”의 차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고 새로 태어나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이방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며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때 이 여인은 개라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며 자기 믿음을 증명합니다. 믿음은 분명 자신을 낮추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믿지 못합니다.
반면 믿으면 자아가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으로 타인을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어, 저 사람은 얼만 전만해도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을 못마땅해하고 교정해주려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지 않으니까 가르치려 들고 고치려 드는 것입니다.
“네가 말을 더듬는 것은 네 생각의 속도가 혀의 속도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야.”
말더듬이인 아들에게 말을 더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전 회장 잭 웰치 어머니의 말입니다.
잭 웰치는 미국 최고의 능변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말더듬이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언제나 참치 샌드위치 두 개가 나올 정도로 주문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말 더듬는 탓에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투 튜나’(two tuna)로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이 말에 잭 웰치는 곧 자신감을 되찾고 말을 더듬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여겼고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잭 웰치의 어머니가 아들의 말 더듬는 버릇을 직접 고쳐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들은 더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어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지 자신이 무언가 하게 만들려고 하면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공부하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모는 더 잘하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을 해서 공부를 잘하게 되면 그 공적은 부모에게 돌아갑니다. 부모는 마치 잔소리를 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잔소리는 자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무한으로 긍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왠지 안 될 것 같은 부정이 끼어드니 자신이 개입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을 믿으면 사람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상대를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기다려줍니다.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란 책을 쓴 저자 김민경 씨는 이 책을 통해 부모와 대화 없이 자란 어린 날을 떠올리며, 내 아이만큼은 ‘잘하면 칭찬, 못해도 격려’의 마인드로 밝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녀 교육서를 읽고, 코칭 리더십 등 다양한 강의를 통해 자녀 교육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믿는 만큼 자란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으면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요?
성호가 게임에 빠져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결국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때려주고 싶었지만,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자신도 어렸을 때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고 군것질을 했고 남은 돈을 숨겨놓고 가슴 졸였던 기억을 떠올리니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엄마 김민경 씨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엄마가 안 줄 것 같았어? 내일부터 2000원을 줄 테니까 1000원은 게임을 하고, 1000원은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러나 6시 전엔 꼭 들어와야 한다. 알았지?”
이렇게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 빠져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반에서 거의 꼴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2가 되자, 게임 때문에 학교를 자퇴까지 하겠다고까지 말하던 아이가 갑자기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교 1등을 하고,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가 원래 머리가 좋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 엄마가 하는 행동을 통해 믿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엄마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생각에 자신도 자존감이 생기고 그 자존감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제게 신부님도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삶을 판단하여 제 가르침을 적용한다면 분명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가르치면 그 사람의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넌 내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적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는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바라시느냐만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할 때 일일이 지적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걷고 말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범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여 고쳐주려는 행위는 상대를 믿지 못해 상대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렸을 때 제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것은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변화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남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적질과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믿지 못하면 지적하고 믿으면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걸음마를 보여주는 것과 걸음마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말의 모범을 보이는 부모는 있어도 옹알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려 할 때 아이는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믿음은 무한한 긍정입니다. 믿는다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내가 죽었음을 보여주십시오. 물론 믿어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도 유다 한 명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바꾸려 해서 바뀌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조차 바꾸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태 15.25
Lord,
help me.
Mt 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