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18-22)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202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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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18-22)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2021.9.24.)

by honephil 2021. 9. 24.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지금도 존재하지만, 한동안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짜 뉴스가 “독자를 기만하거나 조종할 의도로,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된 자료에 근거하는 허황한 정보와 관련된다.”(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확산되는 가짜 뉴스는 거짓을 위한 자유이며, 거짓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함으로써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하셨습니다. 가짜 뉴스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평화롭게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에게 참 평화를 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매우 많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요한으로, 엘리야로,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어떤 수고와 수난을 겪고 부활하실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알고 깨우쳐 그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올바로 실행에 옮길 때, 신앙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와 함께 자유롭게 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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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란? 피를 흘려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

 

    어느 복음에서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누구시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다음에는 항상 ‘수난 예고’라는 것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예수님만 십자가에 매달리고 자신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성령을 받아 파견된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본성을 심어줍니다. 사랑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전에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체로 상징되는 빵을 거저 나누어주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나눔이 그리스도께는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준 것이 아니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어떤 선물도 사랑이 아닙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황제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중국 황제는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립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서태후가 지목하여 3살 때 부모를 떠나 황제가 됩니다. 푸이는 나이가 들어도 신발 끈을 묶을 줄도 모르고 칫솔에 치약을 짤 줄도 모를 정도로 완전한 대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가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푸이는 황제로 살다 6살 때 시대 상황에 따라 폐위됩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어 그는 아직도 자신이 황제인 줄 알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그 성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결혼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는데 17살이 된 푸이는 주위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같은 날 2명의 부인을 얻습니다. 이는 자금성 안에서 안위를 누리던 이들이 푸위를 잡아놓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두 황후 중 하나는 아편 중독으로 남의 남자의 아이를 낳고 다른 황후는 이혼 소송을 제기해 푸이는 중국 최초의 이혼남이 됩니다.

 

    그 후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등극하지만 사실 이도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친 후 식물원 정원수로 일하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세상에 중국 황제만큼 엄청난 권위와 재산, 그리고 여자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황제였고 많은 여성을 알았으며 청나라의 재산이 한때는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선물들 안에 없었던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주는 이의 ‘피’입니다. 주는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려 그런 선물들을 한 것이지 그 안에 피를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피를 줄 유일한 그 사람들은 부모였지만 그는 부모에게서 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받는다고 다 선물이 아닙니다. 그 선물 안에 피가 들어있어야 나를 살리는 선물이 됩니다. 다 가졌던 남자 푸이는 감옥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 모든 것 안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음을 그때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받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이렇듯 사랑의 고통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은 사람을 그냥 껍데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달걀도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썩어버립니다. 하지만 음식으로 먹을 때는 영양의 차이가 크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정란이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정란에 생명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탉이 키워진 환경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정란은 아무래도 양계장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키워져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가 들어간 선물과 들어가지 않은 선물이 있습니다. 피가 들어가지 않은 선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내가 주는 선물에 나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사실 부모도 죽지 않는다면 자녀를 위해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닌 그냥 물질일 수 있습니다. 돈 많은 부모가 식모에게 시켜 힘들이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자녀는 올바로 클까요?

 

    어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여자분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라 큰딸을 키우는 것보다 일에 더 치중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엄마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래서 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큰딸은 비록 풍요하게 자랐지만, 자신은 지독한 열등감에 자해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구타하는 남자를 떠나지도 못합니다.

 

    돈이 많아서 돈으로 편하게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그렇게 자존감 없는 아이로 자라나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인들은 고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보모들은 기계로 아이들의 젖병을 만들어 아이들이 배고플 때마다 젖을 먹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몸은 편해졌지만, 아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아이들은 젖을 원하는 게 아니라 피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고통 없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그 주는 것 안에 내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무언가 주면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주는 선물 안에는 그저 그 사람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https://youtu.be/teZsDg95kj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

하까 2,9

 

Greater will be the glory of this house

the latter more than the former.

Hg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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