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루카 6,6-11)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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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루카 6,6-11)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21.9.6.)

by honephil 2021. 9. 6.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배웁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 때도 있었고, 길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받으시고 당신을 찾아온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 6,1-15 참조). 또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세관장 자캐오를 찾아내시고, 그와 그의 집안에 구원을 선사하셨습니다. 이에 자캐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여, 그들을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해 줍니다(루카 19,1-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 병자는 오그라든 손으로 말미암아 오그라든 마음까지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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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있는데 “예수님이라면?”은 왜 또 필요한가?>

 

    오늘 복음도 율법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만을 지키려는 이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대결합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이를 안식일에 회당 안에서 고쳐주십니다. 안식일 법으로는 일해서는 안 되는데,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그것이 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 머리 안에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만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물음에도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은 무조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빠진 오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자아만 더 커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내 뜻과 반대되는 주님의 뜻입니다.

 

    의사 김범석 씨는 이런 환자도 접해보았습니다. 폐암 말기의 환자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혼했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동거인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부인이 아니었고 환자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동안 혼자 병원에 다니며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암이 진행되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화장실도 혼자 가기 어려워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급기야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하며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4~5년 전쯤 동생이 사업을 한다며 2억을 꿔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갚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해져 연락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그렇게 분하고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호스피스 팀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동생에게 연락이 닿았고 형의 소식을 모르던 동생은 어느 날 형을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를 찾아온 사람은 동생이 처음이었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형님을 불렀습니다.

    “형님….”

 

    의사는 형제간의 상봉을 위해 뒤로 약간 물러섰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다가갔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피골이 상접한 형의 몰골을 보며 동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혔습니다. 형제는 서로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2억 원이라는 돈과 원망과 세월이 할퀴고 간 두 사람 사이의 틈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습니다.

 

    한참 뒤, 형이 동생에게 할 말이 있는지 가까이 오라고 힘겨운 손짓을 했습니다. 숨이 차서 목소리를 크게 낼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동생이 형의 얼굴 쪽으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에게 있는 힘을 다해 말했습니다.

    “너… 내 돈… 2억… 갚아라….”

 

    병실에서 두 형제의 화해를 기대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훈훈해지던 병실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말했습니다.

    “내 돈… 2억… 갚으라고….”

 

    동생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고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동생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환자도 동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간병인을 보내주었고 그 비용은 본인이 부담했습니다.

 

     며칠 후 환자는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 갚으라는 말이 환자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출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김범석, 흐름출판]

 

    이 이야기를 들으니 임언기 신부님의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냉담하던 어떤 간암 말기 암 환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는 신부님 등 뒤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누구에게 죄가 없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율법을 지켰을까요? 자기 자신을 위해 지킨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율법’일까요, ‘뜻’일까요? 율법은 나의 자아를 죽여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자기를 키우고 교만하게 만드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물론 위 예화의 환자도 그렇습니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 죄가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있으니 빌린 돈을 갚으라 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뜻’도 그럴까요?

 

    ‘지금 주님의 뜻’이란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떤 마음이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셨을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만약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기도를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다면 율법주의자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아 숭배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주님의 뜻’을 매 순간 찾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뜻’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예수님 뜻’을 따른다는 말은 나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어느 교회의 예배 도중 찬양대가 마지막 찬송을 부르려는 순간 한 남루한 복장의 사내가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사내는 곧바로 통로를 걸어 강단 앞에 선 후 떨리는 목소리를 말했습니다.

 

    “저는 몇 달 전에는 활자를 뽑아 조판하는 인쇄공이었습니다. 새로운 인쇄기가 도입되자 직장을 잃고 며칠 동안 거리를 헤맸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배웠겠지요. 그러나 저를 위로해준 사람은 목사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찬송 ‘주와 함께 가려 하네’를 부르셨지요. 과연 그 의무가 무엇인가요?”

 

    사내는 말을 마치자 곧 실신했고 며칠 후 목사의 집에서 이런 말을 하며 운명했습니다.

 

    “예수님이셨어도 당신처럼 하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곳의 맥스웰 목사의 설교도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미사여구도 예화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묻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합시다. 우리도 한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이게 된 책이 찰스 셸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윤리 주의자가 됩니다. 하느님은 윤리 주의자를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윤리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본성은 유일하게 ‘뜻’으로만 변화됩니다. 뜻을 바꾸면 본성이 바뀝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자녀인 그리스도의 뜻으로 나의 뜻을 바꾸지 않는 이상 자아 숭배교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단순한 질문을 할 때만 인성의 문을 닫고 신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https://youtu.be/wRgHsVLSVEA

 

2021 09 06/ 율법이 있는데 "예수님이라면?"을 왜 또 물어야 하나?/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

2021년 나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율법이 있는데 “예수님이라면?”은 왜 또 필요한가? 오늘 복음도 율법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만을 지키려는 이들과 안식일의 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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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콜로 2.3

In Christ are hidde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Col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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